[배석규의 음악칼럼] 잦은 가을비 - 그리움을 담아 내리다

2023년 09월 20일
Eranos

가을비 우산 속

  • 최헌, 2006

가을비

  • 유열, 2006

찬비

  • 김희진

가을 가랑비 (Дождик осени:도즈지크 오세니)

  • 엘레나 깜부로바(Елена Камбуровa)

가을비 온 뒤에 (После Дождичка:뽀슬레 도즈지츠까)

  • 엘레나 깜부로바(Elena Kamburova)

So Fell Autumn Rain (내리는 가을비)

  • 눈물의 호수(Lake of Tears)

올가을엔 비가 잦은 편입니다. 비가 자주 내려면 늦더위가 빨리 물러가는 게 통상의 초가을 날씨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릅니다. 비 내린 사이사이 날씨가 여전히 꽤 무덥습니다. 지나간 주말에는 가을장마처럼 비가 오락가락했습니다. 잠시 쉬어가던 비가 오늘 새벽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오늘 하루를 흠뻑 적실 정도로 꽤 내릴 모양입니다.

내일부터 날이 들기 시작하면 한동안 가을비를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맑아진 날씨는 추석 연휴까지 이어집니다. 정확한 추석 연휴 예보는 나오지 않았지만 추석 연휴 동안 비 소식이나 태풍 소식은 없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리는 비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비 그치면 하늘이 더 높아지고 더 푸르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게다가 늦더위도 한풀 죽어 공기가 맑고 선선해지면서 지내기 좋은 가을 날씨가 펼쳐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날씨가 추석 연휴 엿새, 잘 활용하면 길게는 열흘 이상 연휴로 이어지면서 가을방학을 맞은 듯 여유로워질 것도 같습니다. 그런 가을날들을 기다리면서 오늘은 한동안 떠나있을 가을비와 함께합니다.

가을비는 농촌에서는 흔히 ‘떡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수확기인 가을에 비가 내리면 비를 핑계 삼아 편안하게 쉬면서 내친김에 떡을 해 먹는다고 해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비라는 이야기입니다. 도시에서는 창밖에 촉촉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 커피 한잔을 마실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가을비는 추억을 불러오고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헤어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상기시켜주는 모양입니다. 적어도 가을비를 그려내는 노래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 정서는 국내 가요나 나라 밖의 노래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을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트롯이 바로 7080 추억의 노래인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입니다.

역시 사랑했다가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가을 노래가 됐습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최헌은 1970년대 후반 가수왕에 오를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투병 중이던 그는 11년 전 가을 예순다섯 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노래를 커버한 가수가 많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인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어 봅니다. 50대 후반에 부르는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입니다.

80년대의 팝 발라드로 그려낸 ‘가을비’를 만나봅니다. 가수 유열은 한국외대를 다니던 1986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듬해 내놓은 노래가 바로 ‘가을비’입니다. 이 가을비도 헤어진 옛사랑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조금 쓸쓸하기는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밝아지는 가을에 듣기 좋은 노래입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열심히 노래 부르던 유열은 이후 라디오 DJ로, 뮤지컬제작자로 더 많이 활약했습니다. 40대 중반의 유열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가수 하수영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서른네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가수 두 사람의 길을 열어주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부산에서 음악 살롱을 전전하던 최백호에게 다리를 놓아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역시 부산 출신인 윤정하에게 자신이 작사 작곡하고 불렀던 ‘찬비’를 리메이크해 독집 음반을 내도록 도와줘 인기가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선 굵은 목소리로 담백하게 불렀던 하수영과 달리 차분하고 서늘한 음색으로 ‘찬비’를 부른 당시 중앙대를 다니던 윤정하의 노래는 크게 인기를 얻어 가수로서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이 ‘찬비’는 가을비이기는 하지만 겨울을 재촉하며 늦가을에 내리는 비입니다.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하는 ‘ 마음을 밤새 내리는 차가운 가을비에 비유하며 사랑했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라나에로스포‘ 출신의 포크 싱어 김희진의 커버송으로 들어봅니다. 2017년 ’가요무대-빗속의 연안‘ 특집 무대입니다. 김희진은 지난해 대한민국 연예 예술상 여자 포크 싱어상을 받았습니다.

러시아로 가봅니다 ’가을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가수가 엘레나 깜부로바입니다. 나이 여든세 살, 아직도 무대에서 노래하는 ’러시아 로망스의 여왕‘입니다. 영혼을 실어 독특한 음색으로 노래하는 그녀는 애상적인 로망스 가수 가운데 최고입니다. 마음속까지 촉촉하게 적셔주는 그녀의 ‘가을비’는 노래가 된 시입니다. 음유시인 블라트 오쿠자바의 시에 영화음악 작곡가 이삭 쉬바르츠가 곡을 붙였습니다. ‘가을비’라고 했지만 정확한 뉘앙스는 ‘가을 가랑비’, ‘가을 소슬비’ 정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비를 의미하는 러시어어 도즈지(Дождь)란 단어 대신 도즈지크(Дождик)를 선택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저항의 시대를 살면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시대적 고민을 담아낸 음악 활동을 하는 사람을 러시아에서는 바르드 (Бард:Bard)라고 부릅니다. 사전에는 음유시인, 즉흥시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까부로바도 오꾸자바도 쉬바르츠도 모두 바르드입니다. 특히 오꾸자바와 쉬바르츠는 모두 소련공산당의 총살형으로 아버지를 잃은 시인과 음악가입니다. 두 사람은 시대의 아픔을 삼켜가며 형제처럼 손발을 맞춰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여기에 깜부로바가 울림 있는 보컬로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세 명이 그렇게 만들어낸 ‘가을비’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됐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야 나를 위해 울어다오!’ 4절까지 있는 러시아어 노래라 번역 자막이 있는 버전으로 골랐습니다.

깜부로바는 1995년 러시아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러시아 공훈 예술가’ 서훈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100여 개의 영화 ost와 샹송은 물론 클래식까지 커버하며 내면의 깊은 감성으로 러시아인들의 정서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가을비’가 담긴 같은 앨범 ‘블라트 오꾸자바의 노래들’에 같이 담긴 노래 ‘비가 내린 뒤’(뽀슬레 도즈지츠까: После Дождичка)도 오꾸자바와 쉬바르트, 깜부로바가 호흡을 맞춰 만들어냈습니다. ‘비가 내린 후 하늘은 넓습니다. 평화의 시대 거리에서 들리던 오케스트라 멜로디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가수가 없습니다.’ 일흔 살 때인 2011년 깜부로바입니다.

러시아 옆 북구 스웨덴으로 가봅니다. 그곳의 헤비메탈 밴드 Lake of Tears(눈물의 호수)가 그려내는 ‘내리는 가을비’로 마무리합니다. 1994년에 결성된 이 밴드는 2천 년에 해체됐다가 2003년에 재결성돼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9년 4집 ‘Foever Autumn’에 담았던 노래가 바로 ‘So fell Autumn Rain’입니다.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안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무엇보다 가을비를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내리는 가을비가 고통을 씻어주고 슬픔을 걷어 갑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밝아진 느낌으로 가벼워진 느낌으로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어찌 됐건 꿈을 간직하고 가게 만드는 긍정과 희망의 가을비입니다. 메탈 밴드의 환상적인 사운드가 귓전에 오래 남는 노래입니다.

사흘 뒤 주말이면 추분(秋分)입니다. 추분을 2-3일 앞두고 가을꽃들이 서둘러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구절초가 꽃잎을 열기 시작했고 용담도 하루 이틀 사이에 꽃망울을 열 것 같습니다. 여뀌과의 여러 꽃도 모양내기에 바쁩니다. 이제 곡 추분이 지나면 해가 더 짧아질 테니 조급한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사람까지 마음이 급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가을비 그치면 느긋하게 가을꽃들과 친해지고 가을과 친구삼는 여유를 가지면서 명절을 맞으면 됩니다. (배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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